천재들의 삶에 드리워진 명암도 낱낱이 드러난다. a' X; V$ H5 w/ x% v, Q& t% [
) u( l; X4 i2 p R; h: N- A3 O3 z% f
평생에 걸쳐 권력의 언저리를 맴돌았던 정철. 그는 다혈질이었고 직선적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입 밖에 내야 했고 반대파를 공격하는 데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0 j, m$ f& l: G; U* h# ^
4 L7 O+ M; }" |
동서붕당의 한가운데 서서 300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당쟁 시대를 열었고,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서인의 행동대장을 자처하며 1000명이 넘는 반대파를 숙청했다. 조선실록은 그가 술에 취해 옥사를 다스리면서 증거를 조작했다고 전한다.
. J- v- X; f$ x$ i; T! T
* n& q% @2 W2 `, ^그러면서도 그의 문학적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쟁의 진흙탕 속에서도 후세에 길이 남을 절창을 쏟아 냈으니, 그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국문학사상 최고의 봉우리로 평가받는다. " \9 N* e/ K1 A/ W3 @5 c
" W, }% D; `& F/ ^( i3 ~- e
국문시가에서 그가 이루어 낸 빛나는 업적을 생각하면 정치인으로서 정철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피에 전 그의 정치 역정을 생각하면 시인으로서 송강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 y3 o& G- T7 x2 ~9 S/ W4 X
* |* ^$ O7 y G7 w! z5 o일생에 8000여 편의 시를 지어 붓을 달려 시를 쓴다는 말을 들었던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 역시 선비의 귀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랫동안 한직 말단을 전전하며 시대를 탓하던 그는 무신정권의 등장으로 입신양명의 기회를 거머쥐었다. 최씨 정권에 의해 발탁된 어용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재는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데 쓰였으니 그의 서사시 동명왕편은 고려인의 자부심을 만대에 전한 시문의 백미로 꼽힌다. |